일제강점기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식인 사건에 저항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가 무차별 학살된 사실이 정부 조사로 처음 확인됐다.
몇년 전 일본군 식인사건과 관련한 생존자 증언이 나온 적은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사건 전반의 진상을 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오병주)는
2006년부터 3년여간 조사를 벌여 펴낸 `밀리환초 조선인 저항사건과 일본군의 탄압 진상조사 보고서`를
5일 공개했다.
보고서를 보면 1942년 초 조선인 군무원 800∼1천명은 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마셜제도 동남쪽 끝에 있는 밀리환초로 강제 동원됐다.
이 곳은 크고 작은 100여개 섬이 가늘고 둥근 띠 모양을 이루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최전방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원래 원주민 500여명이 살던 섬에 일본군과 징용 조선인이 몰려오면서 1944년 초 거주 인원은
5천300여명을 넘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토질, 기후가 좋지 않은 데다 미군 공격으로 1944년 6월 이후 식량 보급이 막히자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섬에 흩어져 식량을 채집하거나 농경, 어로로 생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1945년 2월28일 체르본 섬에 살던 조선인 120여명이 감시 목적으로 파견된 일본인 11명 중
7명을 숲속으로 유인해 흉기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조선인들은 거사가 성공했다고 여기고 이튿날 미군에 투항하려 했지만 날이 밝자
이웃 루크노르섬에서 기관총으로 완전무장한 일본군 토벌대 15명가량이 체르본섬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인 1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일부 조선인은 야자수 나무 위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는데 이들의 증언으로 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히지 않고
공개될 수 있었다.
보고서는 조선인의 집단 저항이 일본군의 식인사건 때문으로 보인다고 결론냈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1945년 초 일본인이 숙소로 '고래고기'를 갖다 줘 허기진 조선인들이
이를 먹었는데, 며칠 뒤 근처 무인도에서 살점이 도려져 잔혹하게 살해된 조선인 사체가 발견됐다.
주변에 자꾸 사람이 없어지는 걸 이상하게 여겼던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산 사람을 살해해 먹었고
조선인에게도 먹인 것을 눈치챘다.
연구를 진행한 조건 전문위원은 "저항사건의 발단이 된 '일본군 식인사건'은 실증에 어려움이 있으나
적지 않은 정황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사실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밀리환초 식인사건은 독특한 정신주의와 결부된 일본군 내의 가혹한 풍토, 기아상황과 미군에 대한 공포,
전쟁 스트레스가 중첩돼 일어난 만행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연합뉴스, 매일경제)
첨부 : 태평양 전쟁 당시의 실제 사건 내용
태평양 전쟁 당시에 발생했던 일본군의 식인 행위 중 일부의 경우에는 기아가 닥쳐오지 않은 경우에도
발생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식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패전으로 기울어지는 전황에 대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포로를 잡아먹음으로써 적군에 대한 승리감을 얻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 중에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아버지 부시)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데,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시마 식인 사건입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1943년 6월 해군장교로 임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해군 조종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당시 만19세로 미 해군의 최연소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폭격기 조종사로 태평양 방면에 배치돼, 1944년 9월2일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 폭격에 나섰습니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섬인 치치시마(父島)는 이오시마(硫黃島) 북쪽 200km에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시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중계지였습니다.
제51 뇌격대(VT-51)의 일원으로 출격한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애칭은 ‘바바라’,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전 미국 퍼스트레이디 바바라 여사, 현 부시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바라’는 8000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명중해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면서 위치를 가르쳐준 덕분에
그는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함정 두 척이 그를 생포하러 쫓아왔지만
미군기들이 물리쳤습니다.
부시 중위는 그렇게 두세 시간가량 치치시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후 풍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에 미군 잠수함이 그를 구조했습니다.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를 겨냥한 수차례의 폭격 와중에 미군기가 격추돼, 미국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조종사 가운데 부시 중위만 유일하게 생환했습니다.
다른 8명의 조종사인 지미 다이, 글렌 프로이저, 플로이드 홀, 마브 모숀, 워런 얼 본, 딕 울러프, 그레이디 요크,
신원미상의 비행사는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일본군의 식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현 부시 미국 대통령이 1946년 7월생이므로 만일 이때 부시 전 대통령이 구조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으면
현 부시 미대통령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치치시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森 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시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이오시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대본영은 치치시마의 다치바나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습니다. 해군도 모리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켰습니다.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성은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전쟁범죄를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이사무 육군 소령과 요시이 시즈오 해군 대령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치치시마 식인 사건은 승리감 고취를 위한 식인이라는 점 외에도 일본군 고위 장성이 직접 지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사건입니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 8명을 총검이나 죽창으로 마구 찌르고 용수철채찍으로 후려치는 등의 고문을 한 후
포로의 가슴과 배를 가르고 간 등 내장과 허벅지의 살을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소령은 잔인한 성격으로 평소에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1947년 1월13일 도쿄재판에서 로빈슨 검사가 일본군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식인 사건은 1945년 2월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가토 다케무네 대령이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뭔가 육류와 술을 준비할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한 되를 준비시켰습니다. 인육은 가토 대령의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간(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坂部)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945년 3월9일 오전9시 대대장 육군 소령 마토바 스에이사무
발령방법: 간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마토바는 보조위생병들을 집합시켜서 포로의 해부 광경을 지켜보도록 명령했습니다.
사카베는 마토바의 지시대로 시체를 처리했고 308대대의 장교 전원이 방공호 안에 있는 부대장실로 불려와
포로의 인육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치바나는 젓가락으로 인육을 집어 옆자리에 앉은 사카베 군의관에게 먹이기도 했습니다.
대충 씹는 흉내를 내던 사카베는 곧장 화장실로 가서 모두 토해냈다고 진술했습니다.
해군의 요시이 대령도 구라사키 대위, 고야마 소위 등 부하 장교들과 함께 구금 중이던 미군 포로를 살해하여
장기와 인육을 적출한 뒤 이를 병사들에게 먹도록 했습니다.
일본병사 오와미쯔의 진술에 의하면 가장 먼저 잡아먹힌 미군포로는 전신교환원 00였습니다.
일본군은 00를 새로 판 무덤앞에 꿇어앉혀놓고 눈을 가린후 군도로 머리를 자르고 살을 도려내었습니다.
다음으로 00이 처형되었는데 한 일본군 장교는
《 우리는 죽창으로 00의 간을 산산조각낸후 채소, 간장, 양념을 넣고 삶아 맛잇게 먹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세번째로 학살된 미군은 비행사 00였습니다. 일본군은 00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잘게 썰어 삶아먹은 후
다른 비행사 00을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그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먹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치치시마의 미군 포로들은 일본군에게 잡아먹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악한 군비와 부족한 식량으로 태평양의 크고작은 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이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전후 도쿄재판의 기록(1946년 12월11일)에 의하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제18군사령부가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치치시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부족이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치치시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습니다.
이걸 볼 때 치치시마에서는 기아 때문이 아니라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윽고 일본이 패전하고 1945년 9월2일, 치치시마에도 미군이 상륙했습니다. 9월3일 다치바나 중장과
모리 중장이 대표로 미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항복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습니다.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는데,
그에 대하여 미군 대표인 스미스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으나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둔 상태였습니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침묵할 것을 지시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연기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2월 초, 마침내 셰퍼 미군 소령은 호리에를 불러 “잔학행위의 수괴는 육군의 다치바나와 마토바
그리고 해군의 모리와 요시이가 아닌가?”하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치치시마 관련 피고는 다치바나 중장 이하 25명이었는데,
토라크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범용의자는 모두 63명에 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치치지마의 식인사건이 가장 주목을 끌었습니다.
심리 중에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다치바나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酒宴) 상황을 묘사하면서, 다치바나가 “맛있다, 한 접시 추가!”라고 했다고 증언하자
법정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미군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캐너벌리즘(cannibalism·식인풍습)’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그 사정을 미군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 게재가 금지됐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믿은 아들이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니 너무도 고통스럽다”며
기사가 실리지 않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탄원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령, 이토 중령, 요시이 대령,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과 가토 대령,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령은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사카베 군의관은 4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해군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요시이 대령은 마지막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무차별 폭격을 한 미군이 나쁘다. 조종사는 당연히 처벌돼야 한다.
인육은 전의고양과 사기진작을 위해 먹도록 했다.
모든 명령은 내가 내렸으므로 부하들에겐 책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의 나카지마 대위는 사형선고 직후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만행을 변명했습니다.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포로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 아닙니까.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갑니다.”
다치바나나 마토바의 경우는 유서나 최후진술이 없어서 그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특히 두 사람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약 1년 동안 매일 미군 병사들의 학대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사형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88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전쟁중 경험한 최악의 시기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1989년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제서야 일본인을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일본군 식인사건|작성자 체페슈 https://blog.naver.com/hurucin/140153316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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