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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편] 천생연분 옥토102020-11-13 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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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다만 문제는 기록적인 부분에서 구멍이 있다는 거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 모두 나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럼 결론은 내 기억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됐다는 건데 도통 내 입장에선 인정도 납득도 안 된다는 게 또 문제겠다. 보통, 아니 거의 대부분이 이런 경우엔 그 기억이 당사자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거나 혹은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내 경우엔 후자였다.

90년대였다. 어린 나는 일요일 늦은 오후를 맞아 차량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건 주말마다 으레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토요일이면 오후가 되기 무섭게 부랴부랴 차를 몰고선 여행을 떠났고, 아직 혼자 집을 볼 수 있을 만큼 자라지 못한 나는 일요일이면 지루한 기분과 육체적 피로에 몰려 파김치가 된 상태로 귀갓길 내내 뒷좌석 전체를 뒹굴거려야 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우리 가족을 태운 차량이 평소보단 조금 이르게 귀갓길에 오를 때였다. 인적이 드문 여행로를 타던 중 엄마 아빠가 창문 너머의 한 여성을 대화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배낭여행을 나선 거라느니, 친구랑 싸웠는지 뭔지 왜 여자 혼자서 걷고 있는 거냐는 지 따위를 말이다. 엄마 아빠는 곧 그 여성을 태우기로 빠르게 합의를 도출했다. 오지랖이라고? 히치하이킹은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한 나라에서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뿌리 박히게 된 문화일 뿐이라고? 글쎄다. 우리나라도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여행지에서 대학생들이 히치하이킹을 구걸하면 기꺼이 태워다 주는, 그런.

제의를 받은 여성은 잠시간 주저하는듯하다 이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뒷좌석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으로 자리했다. 쏟아지는 엄마의 질문에 여성은 그저 자신은 대학생이고 택시가 다닐만한 곳까지만 태워다주길 부탁했다. 엄마 아빠는 애초 자신들의 생각대로 대학생이 친구와 여행지에서 싸우고선 뛰쳐나와 홀로 귀갓길에 오르는 거라고 확신했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여성은 자신의 등을 거의 다 덮고 있던 커다란 검정 백팩을 앞으로 안고서는 이따금 숨을 몰아쉬었다. 또 시선은 줄곧 고정되지 않은 채 창밖 풍경 이곳저곳을 훑느라 분주했고 주기적으로 눈을 감은 채 안에서 눈알을 격렬히 흔들어대느라 눈꺼풀 바깥으로 그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본래 싹싹한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여성의 행동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것인지라 어쩐지 무서워져 앉은 거리가 멀어지도록 조금씩 티가 나지 않게 몸을 옮겼다.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떨어졌다고 생각해 다시금 여성을 훔쳐보자 어느새 여성의 손엔 내 교과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나는 금요일 숙제를 해결하고자 주말마다 차량 뒷좌석을 책상 삼아야 했다. 문제는 그런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주로 일요일 귀갓길에야 불씨에 콩 볶듯 해결한다는 거고, 이제 문제는 여성에게 감히 교과서를 달라고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성은 교과서 페이지를 거칠게 넘겨가며 무언가 끼어맞추려는 듯 이따금 얼굴을 살짝 치켜세우곤 미간을 찌푸린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나는 한층 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째서인지 그런 여성의 행동을 가만히 탐구하듯 응시하게 됐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린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여성은 이번엔 관심사를 나로 바꿨는지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이곳저곳 관찰하는 눈치였다. 이어 여성은 교과서를 덮고는 표지 위로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적혀진 내 이름을 보는 듯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내 이름을 들킨 거다. 어쩐지 나는 한층 더 두려워져 여성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감히 거두려고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렸다.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긴 여성은 대뜸 든 자신의 오른손을 내 얼굴로 향했다. 그리곤 무척이나 부드럽고 기품있는 움직임으로 내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귀 쪽까지 아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여성은 다분히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인 듯 경직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나는 그 쓰다듬 한 번으로 완전히 진정을 되찾았다. 그제서야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고 고개를 숙이느라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는데,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치켜진 여성의 얼굴이 다시 처음 차량으로 올라설 때의 그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치켜진 얼굴은 운전석 앞유리창을 향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여성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조심해!'라고 소리 질렀다.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성은 백팩으로 내 앞을 덮고는 또 그 위를 자신의 몸 전면부로 감싸 안았다. 한편 흡사 포식자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여성의 외침에 아빠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돌림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량은 가드레일에 아슬하게 붙여진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 엄마 아빠의 '어어' 하는 숨넘어가는 듯한 외마디 말이 들려왔고 나는 내 몸이 좌우로 빠르게 요동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그날 내 기억의 마지막이다.

눈을 떴을 땐 침대였다. 내 방 침대. 목조 프레임으로 제작된. 양옆 끝으로 가드레일마냥 차단막이 있는 어린이용 침대. 나를 깨운 건 여느 날처럼 엄마였다. 엄마는 빨리 나와서 밥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이 이어졌고 내가 그날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토요일이었는데도 언제나처럼 여행을 가지 않고서 엄마 아빠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날이었다. 늦은 점심식사 동안 엄마 아빠의 이어지던 수다를 귀동냥 하면서 나는 그날 우리 가족이 추돌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나를 눈치챘는지 엄마는 내게 너는 기억이 잘 안 날 거라고 했다. 아이들은 놀라면 그러기도 한다면서.

당시 2차선 국도 커브 길을 들어서려던 순간 맞은편에서 차선을 점령하며 갑작스레 튀어나온 관광버스가 우리 차량을 거의 덮치듯 스쳐 지나갔다고, 아빠가 재빨리 핸들을 꺾은 뒤 관광버스가 지나감과 동시에 다시 반대로 핸들을 돌리며 브레이크를 밟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고, 그 직후 내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곧 잠들었고 다음 날 멀쩡해 보여서 괜히 놀랄까 봐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그럼 그 누나는?' 내 말에 엄마와 아빠는 무슨 누나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나는 히치하이킹부터 사고 직전 여성이 내 몸을 덮던 거까지를 얘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나를 당혹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엄마 아빠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내게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 한다며 핀잔을 줬다. 쟤는 가끔 보면 엉뚱한 말을 한다고. 네가 꿈꾼 걸 착각하는 거라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날 사고에 대해 히치하이킹했던 여성의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엄마 아빠의 잡담에 등장하는 놀림감 소재가 되면서부터 나는 그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 시작했다. 다만 그날 일은 여전히 내 머릿속 앞 좌석에 자리하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성인 이후에도 가끔씩 불쑥 왕래하는, 그런 오랜 친구로 말이다.

물론 그동안 그날 일에 대해 되짚어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나는 어린애가 겪은 발작적인 사고와 그에 더해져 이후 꾼 꿈과의 혼동과 혼합 속에서 마치 비슷한 퍼즐 조각을 억지로 꿰맞추듯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건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이었다.

초여름이 되었다. 초여름의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29살이었고 서울로 올라와 있었다. 올라와 있었다고 표현한 건 이유가 있다. 당시 나는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이주한 부모님(이른 은퇴와 함께)을 따라 몇년간이나 한량생활을 영위하던 와중이었다. 밤낮으로 새소리 따위나 들어가며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써보고 싶은 글을 끄적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내가 쓰던 글이 제법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결국은 업체들과 상업적인 계약을 맺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날 나는 또다시 어느 업체와 미팅을 가진 자리에서 그대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간만에 서울 여행을 와 일까지 따냈으니 프로 한량께서 할 게 뭐겠는가. 오랜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은 나는 붕 떠버린 시간을 축내고자 해가 막 저무는 가운데 환락스러운 도심 중심을 목적 없이 거닐며 사람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골목에서였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를 거의 끝에서 끝까지 둘러봤을 때였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살구색에 전면으로 화려하면서도 어지러이 조각형태로 수놓아진 긴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수다 도중 웃음을 흘릴 때마다 귀로 깡총히 달린 같은 살구색상의 태슬 귀걸이 숱이 우아하게도 하늘거렸다. 또 어깨로는 짙고 세련된 네이비 색상의 얇은 밀리터리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그런 옷매무새들은 그녀의 더 없이 보기 좋은 테를 간신히 뒤쫓느라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으며 동시에 지극히 트렌디한 옷차림임에도 굉장히 기품있는 모양새로 이채로움이 발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녀를 본 100명이 모두 그녀에게 반할 정도라고 확신은 할 수 없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형에서 다시 없을 찬미의 욕구를 느꼈다. 그저 첫눈에, 그리고 한눈에 대책 없이 반해버린 걸 누가 글쟁이 아니랄까 봐 요란하게도 늘어놓는다고 조소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서 어떤 신념에 가까운 애절함을 느낄 정도였다. 맹세코 그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오늘 말을 걸지 못한다면 그냥 강바닥에 뛰어들어 가라앉는 게 나을 거라며 스스로 다짐하고 독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 전부를 던져놓은 채 미친놈이 된 건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친구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여자에게 말을 걸 땐 그 여자의 동행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라는 게 성경에도 나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목덜미를 노리는 이리마냥 가만히 숨죽이곤 기다렸다. 일단 물게만 되면 결코 놓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품고서.

사람들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만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의 친구가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십중팔구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고 나는 그녀의 친구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유추하고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놀라지 않을 만큼의 가까운 거리로(하지만 내 훤칠한 키가 제대로 파악될 만큼은 멀게), 그리고 사선으로 비스듬한 위치까지 걸어 나간 나는 아주 정중하고 느릿한 묵례를 하고는 말을 꺼냈다. 안녕하냐고, 계속 보고 있다가 온 거라고, 반했다고, 하지만 외형만 보고 반한 거라서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해보고 싶다고, 어차피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시간은 흐르는 거 아니냐고.

안다, 굉장히 뻔하고 뻔뻔하고 저질스럽기까지 한 말이란 거.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표정, 목소리, 말투, 제스쳐다. 오히려 메시지는 유치하고 직설적일수록 효과적인 법이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고 진심 어리며 동시에 따분하진 않은 사람으로 주지시키고자 내 모든 행동거지를 컨트롤하랴 비지땀이 나는 걸 숨겨야 했다. 정말이지 똥 새도록 노력했다. 그녀의 테를 뒤쫓는 옷매무새들마냥.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내 위아래를 훑어내렸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내 머리, 얼굴, 짙은 데님 소재에 가운데로 격자무늬가 수놓아진 셔츠 상의, 왼손으로 셔츠 색상과 같은 밴드가 채워진 시계, 복숭아뼈가 온전히 드러나는 기장의 하계용 검정 슬랙스 하의, 그리고 흰 가죽에 베이지색 패턴으로 스웨이드가 자리한 스니커즈까지를. 나는 어쩐지 그녀의 눈이 나를 투과해 저 멀리까지 보고 있는 것 같아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한층 더 노력해야 했다. 시선을 거두고서도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는 이내 자기 친구에게 보였던 그 미소를 흘리며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쳐보였다.

나는 대책 없이 천박한 미소가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단속하고는 너무 급하게 보이지 않도록 차분히 그녀의 옆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리곤 다시 한번 안녕하냐고, 반갑다고, 내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29살이라고 처음 목소리를 힘겨이 유지한 채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굉장히 느릿하고 부드럽게 이목구비 전부로 아주 깊은 미소를 짓더니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동안이네.'라고 말하면서. 나는 곧장 몸을 반쯤 일으켜 다소 장난스레 '고맙습니다.'하고 두어차례 꾸벅였고, 그녀는 그게 마음에 찼는지 입도 가리지 않고 고개를 젖혀 깔깔거리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28살.'

그녀와 채 1분도 말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나는 무섭도록 내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그녀의 어떤 모습과 행동을 보더라도 내 자신의 이상향 그대로라고 굳게 믿어버릴 아찔함이 느껴져서 말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대로 수행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친구가 돌아와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이게 어느 곳 어느 때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모습으로 남겨지길 원치 않는다고. 그러니 그전에 어서 전화번호를 받고서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그녀 또한 내 말에 공감했는지 잠금 풀린 핸드폰을 내 손 위에 올려놨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건 1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화였다. 짐짓 꾸며낸 목소리로 '여보세요.'라며 가식적으로 말을 뱉는 내게 그녀는 다짜고짜 지금 어디냐고,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면전에 천재지변 같은 일이 생겨 약속을 깨야겠으며 불가피한 사정이니 다음에 술을 산다든지는 안 할 거라고 쏘아붙이곤 그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어깨로 재킷을 걸친 그녀와 밤 거리를 나아갔다.

저물었던 해가 다시금 그 얼굴을 들이 미려 하고 있었고 이제 나와 그녀는 그녀가 사는 고층 오피스텔 옆으로 이어진 정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적어도 수십시간은 쉬지 않고 이어갈 자신과 바람이 있었으나 어쨌든 빌어쳐먹게도 아침이 되고 있었고 그건 곧 오늘은 이만 빠빠이라는 암묵적인 룰의 환기였다. '이제 너 그만 집에 들어가야지.'라고 한숨 뱉듯 말하는 내 얼굴 한편으로 어떤 일말의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게 그대로 읽혀졌는지, 그게 우습고도 조금은 귀여워 보였는지 그녀는 어깨로 걸쳐진 재킷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사뿐한 움직임으로 내 무릎팍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가만히 아무런 말과 표정도 없이 내 얼굴을 응시했고 나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팍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왜 허리를 감싸지?'라고 물으며 미처 참지 못한 미소를 새어 보냈다. 나는 '너 몸이 뒤로 젖혀지면 재킷이 떨어지니까'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처음 내 무르팍에 앉았을 때의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기다란 머리 끝단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부드럽게 매만졌다. 세상 진귀한 비단이 손에 쥐어진 것 마냥. 이어 그녀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한 채로 응시하더니 곧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살며시(그러나 확실하게) 마치 잠시 올려놓듯 맞췄다. 그건 어쩐지 신성한 의식으로 느껴질 만큼 내 마음을 경건함으로 물들게 한 행위였다.

그녀는 꽃잎 끝에서 조심스레 박차 오르는 나비처럼 내 무르팍에서 날아올라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미소엔 애정어림과 함께 단호함 또한 새겨있었으므로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그녀가 좀전의 입맞춤보다도 부드러이 느껴지는 음색으로 말했다. '이제 너가 하려는 일을 해.' 나는 그러겠노라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한 말들은 모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이었다고, 다시 만날 날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뒤돌아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멀어지면서도 서너차례 연신 뒤를 돌아봤고, 그때마다 그 자리 그대로에서 그 서정적인 눈매로만 살짝 미소짓고 있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술은 조금만 취한 상태였으나 분위기에는 있는 대로 취해버린지라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심산으로 그녀의 동네를 거닐기 시작했다. 동네는 신도시의 전형인듯한 외국풍의 아케이드가 펼쳐져 있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그 거리 골목마다를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평소 돌아다니는 장소가 아니던가. 따라서 충분히 볼만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골목까지 도착해선 이제 택시를 잡으러 큰길 쪽으로 향하고자 골목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내 앞으로 이국적인 정취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도시 아케이드로부터 이국적인 말이다.

군데군데 전신주가 위용을 뽐내고 있고 그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분간이 불가능한 서로 같은 모습의 연립주택들이 사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남은 취기마저 한순간에 말끔히 씻겨 내려진 나는 발작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동네는 없었다. 좌우앞뒤 사방이 처음 보는 주택단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침착하게 현재의 상황을 이론적으로 풀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추론을 도출했다. 블랙아웃이 된 상황에서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아 엉뚱한 곳에서 내려진 거구나 하는. 하지만 이 완벽한 추론에는 오류가 하나 존재했다. 내 손목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으론 그런 일이 벌어지기에 충분한 여유가 없었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선 연신 머리를 쓸어올렸다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애 하나가 언제 왔는지 내 쪽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등교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 그리고 택시를 잡으러 큰길로 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을 요량으로 그 아이를 불러세웠다. 그러자 아이는 인적없는 거리에서 술 냄새를 풍기는 낯선 성인 남성이 경계되는지 몸을 뒤로 움찔거리며 동시에 나를 파악하려는 듯 위아래로 훑어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나는 어떤 명백한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건 마치 진리로 통하는 숨겨진 오솔길을 우연히 발견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깨달음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 양손을 쭉 뻗어 아이를 거의 들어 올리듯 밀쳤다. 아이의 몸이 한참을 붕 떠져선 저 멀리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제 튀어나왔는지 오토바이 하나가 그 굉음보다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와 아이 사이를 가로질렀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아이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였다. 나는 황급히 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본분을 잊고서 가슴팍을 제멋대로 흔들어대고 긴장감으로 혀가 바싹 말라 목 전체가 따끔거렸다. 아이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책가방 사이로 빠져나온 교과서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교과서 표지 위론 큼지막하고 조금은 삐뚤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멈췄던 발을 조심스레 떼고는 다시 아이 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해가 막 저물고 있었다. 유행을 좇아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도배된 상가 거리 골목이었다. 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자명하기까지 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난 이국적인 정취를 따라 길을 걸었다. 그럴듯한 외국어 이름의 펍이 나타났고 그 테라스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친구와 테라스 자리에 마주 앉아 앞에 맥주잔 하나를 두고선 은근한 미소와 함께 조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이 나아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롯이 그녀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소 놀란 듯 입을 조금 벌리더니 수초간이나 나를 훑었다. 무섭도록 고운 그 얼굴 한가운데로 박힌 그녀의 눈이.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왼쪽 앞머리를 들어 올리듯 쓸어올린 뒤 그대로 그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겼다. 그녀의 풍만한 머리숱 사이로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왼쪽 이마 관자놀이 부근 손톱보다 조금 더 긴 모양새의 얄따란 하얀 흉터가 한 치 오차도 없는 피부결 사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그 흉터를 아주 부드럽게 매만졌다.

우스운 건, 어떤 기억은 과거의 것이 더 선명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간혹 주관에 의해 변질됐거나 아예 새로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게 바로 기록이다.

내 경우에도 그런 기억이 하나 있다.

 

후기

고백하자면,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떠한 미스터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출처] 천생연분|작성자 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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